*이 칼럼은 3金의 지역주의를 표현하기위해 지역방언을 이용하였을 뿐 어떠한 지역비하 의도도 없음을 미리 밝힙니다
칼럼을 쓴 본인도 지방출신임을 밝힙니다.
YS, DJ, JP
우리는 이들의 전성시대를 '3金 시대'라 부른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나라의 고질적 병폐, '지역주의적 정치'를 만들어낸 장본인들이기도하다
어떻게 조선시대에도 없던(지역감정은 존재했다) '지역주의 정치'가
이 조그만한 땅에 피어나게 돼서 현대에도 다이묘같은 새끼들이 설치게 되었는지,
이를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그들, '선거기술자'들을 다시 살펴봐야한다.
필자는 앞으로 칼럼에서 4명 정도의 선거기술자를 언급할 것인데

전두환 신군부의 정권장악을 돕고
월계수회를 조직하여 노태우 당선을 이뤄냈으며
비밀외교를 주도하였던 5공세력의 책사 박철언

본인이 생각하는 정치판 읽기 올타임 넘버원
YS를 대선후보로 만들고
이회창에게 복수하기 위해 말년의 바친 허주 김윤환

박근혜, 문재인 정권 당선에 기여한
경제관료 출신 김종인
등이 있는데
오늘은 그 중
7대 대선 당시 신민당 당내 비주류 DJ를
대선후보로 만든 마타도어의 귀재
엄창록을 살펴볼 것이다.

'엄창록', 일단 그가 실존 인물인건 맞다
일단 글쓴 본인이 DJ간첩설이나 이승만 김구 암살설같은 야사를 굉장히 혐오하기 때문에
크로스체킹은 커녕 '카더라 야사'로 똘똘뭉친 이 인물을 다루고 싶지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내 어중이떠중이 비주류였던 DJ를 일약 슈퍼스타로 만든데
이 '엄창록'의 활약이 있었던건 정설이다.

"한표를 얻을바에는 적의 10표를 감표시킨다"
중앙정보부에 따르면
괴벨스, 마오쩌둥식 심리작전에 능수능란한 인민군의 심리전 담당 하사관출신으로
DJ측에 합류 후 각종 선거에서 활약.
당시 캠프인원을 박정희가 이끌던 민주공화당인척 위장시켜
사람들에게 신을 수 없는 고무신을 선물하거나 자존심을 짓밟는 푼돈을 선물하는 등
박정희가 이끄는 민주공화당에 대한 기발하고 악명높은 마타도어를 기획했다고 전해진다.
문제는 영화처럼 그가 박정희 측에 가담해서
'지역감정'을 대한민국 최초로 '정치적'으로 이용했냐는건데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대구, 부산에는 빨갱이가 많다"
- 당시 윤보선측 의원 발언
놀랍게도 초기에 박정희는 사상적으로 의심받던, 소위 말하는 '용공분자' 의심 대상자였던 것이다.
5대 대통령 선거만 봐도 영호남의 지역 감정은 없었다.
여기서 웃긴건 윤보선이 이끄는 야당이 박정희에게 행한 마타도어인데 당시 박정희를 여순사건 관련자로 몰며
일명 '빨갱이' 몰이를 한다.
그리고 그 몰이는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해
영호남 남부지방의 지지를 받은 박정희가 간신히 15만표를 차이로 당선된다.
여기서 재미를 본 윤보선측은 다음 대선에서 새로운 마타도어를 가져오는데,

신민당 "호남푸대접" 강조
-67년 4월 24일 동아일보 발췌
이것이 6대 대선 때, 신민당의 윤보선이 들고온 마타도어
일명 '호남 푸대접론'이다.

6대 대선 결과
그리고 이러한 야당의 마타도어는 나라를 동서로 가르게 된다.
물론 결과는 박정희와 민주공화당의 승리였지만
이때 처음으로 지역감정 불씨가 정치판에서 점화되기 시작한다.
좌파들은 '신라임금론'을 말한 '이효상'을 지역감정의 시초로 지목하지만

"이 고장은 신라 천 년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지만 이 긍지를 잇는 이 고장의 임금은 여태껏 한 사람도 없었다. 박정희 후보는 신라임금의 자랑스런 후손이다. 이제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을 천 년만의 임금으로 모시자"
-1963년 9월 10일 대구 수성천변 민주공화당 유세장 이효상 발언
이는 '다른지역을 타도하자'라는 경쟁구도가 목적이 아니라 집토끼인 영남표 집결이 목적인 영남정치인이 대구에서 발언한 것으로
이 발언 후에도 5대 대선 결과에서 호남의 열성적인 지지가 있었던 점,
이 외의 지목되는 그의 발언은 70년 이후에 발언이라는 점에서
이 사람이 지역감정의 시초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71년도 8대 총선
애초에 여촌야도의 형국에서 박정희와 민주공화당이 미쳤다고 먼저 나서서
자기 텃밭 중 하나인 호남을 적으로 돌릴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이렇게 신민당이 불씨를 지폈던 지역의 피해의식 구도

"영남지방은 고속도로까지 개설하는 정부가 호남선은 복선마저 제대로않고 푸대접하고있다"
"경상도 정권을 타도하자"
김대중
-69년 10월 13일 경향신문 발췌
이러한 불씨를 7대 대선에서 가장 잘 살렸던 것 역시 DJ가 맞다.
자 그럼 이제 모든 것의 시작, 대한민국의 고질병 '지역주의 정치'의 온도계를 따라
그 때 그 시절,
7대 대선으로 가보도록 하겠다.
*이 칼럼은 3金의 지역주의를 표현하기위해 지역방언을 이용하였을 뿐 어떠한 지역비하 의도도 없음을 미리 밝힙니다
칼럼을 쓴 본인도 지방출신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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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모두 음악을 틀고~

자 이제 선수 입장해볼까?
일찍히 대한민국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세 명의 정치인이 있었으니!!!!

첫번째 선수 입장~
부잣집 도련님,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거침없는 상남자 스타일의 이 미남자! PK의 YS !!
두번째 선수 입장~

거침없는 뱃사람같다고? 사실은 여리디 여러~ 호남의 미남자 DJ !!
세번째 선수 입장~

그 누구도 이 남자의 속을 알 수 없다! 이지적인 외모의 미...미... 충청의 JP !!
때는 바야흐로 1969년 제 7대 대선 직전의 청와대

임자, 그동안 밖에서 고생이 많았어

암것도 아녀유~

그래서 말인데... 임자가 해 줄일이 하나 더 있어

...지가유? 뭔데유...?

내 3선 개헌 지지선언 해 "줘"

....

박정희,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민주공화당 4인방을 이용해
JP계파 정리 및 3선 개헌 실행
JP, 69년 청와대 외압으로 3선 개헌 지지선언
대권의 야심이 좌절되다
그리고 또 다른 대권주자 야당 신민당의 유진오가 3선 개헌 날치기 통과 소식에 충격받아 Stroke로 쓰러지면서
사실상 JP vs 유진오로 점쳐지던 대결은 어느샌가
박정희 vs 인기없는 유진산이라는 답도 없는 싸움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뒤집는 좌충우돌의 남자가 있었으니...

마!!!

사람들 : ?

내는 인자 이 시간부로 대선에 나간데이. 인기 없는 후보로 박통을 우예 이기노? 말도 안된다카이

그래도 명망있는 당내 어르신들이 있는데... 유진산이라든지...

마!!!!

므리를 쓰라 므리를... 유진산이 검마 그기는 사쿠라*다 아이가!
*사쿠라 : 겉으로는 박통에 대항하는 것처럼 보이나 박정희와 척을 지지 않음

웅성웅성

진짜 유진산이 사쿠라여...?
그렇다. 이것이 당시 야당선명론파였던 YS가 중도통합론파였던 유진산에게 걸었던, 일명 '사쿠라' 프레임이다.
거기에 대한 유진산의 대응은 다음과 같다.
"구상유취(젖비린내나는 애송이)"
이 간단한 대응 전략은 당시 굉장히 효과적이었고
YS의 출마선언은 문자 그대로 천방지축 꼬마의 철부지 행동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방 나도 이 대선에 참가하겠지라

나도
갑자기 42세 4선 의원 YS의 불꽃같던 도전에
3선 45세 DJ와 3선 48세 이철승이 출사표를 던지면서
당내에서는 더이상 이런 현상을 한낱 꼬마들의 객기로 취급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신민당 당내지도부도 설득을 포기하게 되는데
이것이 신민당에 불었던 열풍
이른바 '40대 기수론'이다
그리고 이 신민당 경선에서 뜻 밖의 결과가 나오는데
압도적이었던 주류파 네임드 YS와 이철승을
비주류파인 DJ가 이겨버린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앞서 언급한 '엄창록'이 등장한다.
이 인물의 야사적 성격 때문에
어디까지가 DJ의 의도인지 엄창록의 의도인지 알 수 없으나
신민당 경선에서 DJ 캠프 측의 행동은 다음과 같다.
1. YS가 부산에서 "우리가 남이가"라고 발언한 것으로 YS가 지역감정을 조장한다고 주장
2. 당내 주류파였던 YS, 이철승은 유진산이 선택한 한명에게 표를 몰아주기로 결정했는데
DJ측은 이 갈등을 이용하기로 결심
사전에 만에 하나 이철승이 지명받지 못하면 DJ를 밀어달라고 부탁 (이는 YS쪽에도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유진산이 YS를 선택하면서 이철승계는 약속과는 달리 일제히 무효표를 행사

당시 명함계약서
3. 결국 1, 2위였던 YS와 DJ의 재투표 과정에서 DJ는 이철승에게 접근,
그 유명한 명함계약서(대권은 DJ에게, 당권은 이철승에게)를 내밀면서 전주에서 자란 이철승에게 "우리가 남이여, 시방?" 발언
등이 있다.
그리하여 결선 투표에서 DJ는 458표를 획득
410표를 얻은 데 그친 YS를 누르고 신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다
이러한 과정과 결과를 지켜봤던 YS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마!!!!!

깜짝


?

"김대중의 승리는 나의 승리다! 김대중의 당선은 나의 당선이다!"
이 후 YS는 측근의원들에게 '배알'이 없냐는 소리까지 들어가면서도 DJ를 전폭지원,
PK지역을 발로 뛰어다니며 DJ 유세를 돕지만
이런 YS의 노력이 무상할정도로
DJ측은 YS에게 선대위원장이라는 직책조차 주지않았으며
DJ가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연설하면 YS는 인적이 드문 안양면소재지에 보내 연설을 시키는 등
YS를 아주 쉰 개밥 취급한다
한평생 성공가도만을 달리던 부잣집 도련님 YS
이런 취급이 어찌나 서러웠던지

와 이라노 나한테!!!!
가오에 죽고 가오에 살던 그가 대선기간 비 오는 시골 여관방에서
측근들이 보는 앞에서 엉엉 울었다고 하니,
DJ와 YS의 애증의 나선은 이때부터 꼬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뭐?
그래서 대선 결과는 어떻게 되었냐고?
DJ는 '향토 예비군 폐지'와 같은 신선한 정책들과

"전라도가 받은 차별은 약 1300여년 전부터이다. 서울 남산에서 돌을 던져 차가 맞으면 경상도 사람 차요, 사람이 맞으면 전라도에서 올라온 식모와 구두닦이다."
김대중, 1971년 4월 대선 유세 발언
동교동계가 소위 '엄창록' 발이라고 주장하는 '지역감정 조장'을 통해 거센 열풍을 이끌어내지만
대선 투표 직전 엄창록이 이후락이 이끄는 중앙정보부에게 납치 된(것으로 보인) 후
투표 3일전, 중앙정보부가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품을 불매하기로 했다'
는 내용의 허위전단을 영남에 대거 투여하는 등
이른바 DJ의 호남푸대접론을 역이용하는 작전 성공으로

간신히 95만표의 차이로
박정희가 3선에 성공한다.
이렇게 보면 7대 대선은 지역감정이라는 상처만 남겨버린
신민당의 거대한 똥볼로 보이지만
결과론적으로 그렇지만은 않다.
박정희는 국가예산의 1/7수준인 600~700억원이라는 자금을 투자하고도
겨우 95만표 차이로 그치는 결과를 얻자
자신의 대중적 인기가 생명을 다했음을 직감
이러한 위기의식은 훗날 박정희를 파멸로 몰고가는 유신헌법 공포로 이어진다.

또한
이러한 박정희의 모습에 회의를 느끼던 JP는
유신 헌법 이후로 박정희에 의해 4인방 마저 박살나고
그저 거수기로 전락한 민주공화당 속에서 조용히 JP체제 구축을 시작한다

한편 대선후보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DJ는 후에
'진산파동'을 계기로 당권전쟁을 시작을 하여
YS, 이철승같은 신민당 주류계를 위협.
훗날 동교동계라는 이름으로 활약할 자신의 세력이 뚜렷해지기 시작하니
바야흐로, 3김의 시대가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2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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