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은 3金의 지역주의를 표현하기위해 지역방언을 이용하였을 뿐 어떠한 지역비하 의도도 없음을 미리 밝힙니다
칼럼을 쓴 본인도 지방출신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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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음악

(이전 줄거리)
YS의 똘기어린 행동으로 풀려버린 85년 정치규제.
이제 전두환과 야당의 대결만이 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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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단임제로 부임한 전두환 정권에게 85년도 총선은 무엇보다 중요한 길목이 되었고
이는 전두환을 막으려는 반대측까지 포함,
양측 모두에게 반드시 잡아야할 선거가 되어버린다.
이 때문인지 전두환의 민정당과 야당, 양쪽 다 엄청난 신경전을 벌이는데...

야ㅋㅋ


니들 '신민당'이라는 이름 쓰는거 금지야ㅋㅋ

???

당명을 금지한다고?

ㅇㅇ ㅋㅋ

뭔 시발 ㅋㅋ ㅇㅋㅇㅋ
(당명 발표일)

저희 당명은 '신한민주당'입니다. 저쪽 '민주정의당'이 줄여서 '민정당'이니까...
제 말 뭔말인지 아시죠? ㅎㅎ

???

ㅋㅋㅋㅋ

ㅋㅋㅋㅋ 좀 치네... 야

ㅋㅋㅋ 왜

'신한민주당'은 '신한당'이라고 불러야함 ㅇㅇ
(실제로 벌어진 일*)

???
이렇게 야당은 '신민당'이라는 당명이 금지되어 사용할 수 없자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여 줄여서 '신민당'이라고 부르는가하면
전두환측은 그걸 또 '신한당'이라고 불러야한다고 별좆같은 기싸움을 하기도하고

야

?

우리 보름 뒤에 선거할꺼임 ㅋㅋ

??저희 지금 막 창당했는데요...ㅋㅋ
선거를 예정보다 2달이나 앞당겨 진행하는 등
갖은 꼼수를 부렸는데
박정희 정권아래에서만 몇 십년을 구른 짬밥의 야당도 이 기싸움에 질쎄라

응 암살당하면 그만이야~
선거 4일전 DJ가 목숨을 걸고 미국에서 귀국하는가하면

YS측은 2위도 당선되는 당시 중선거구제의 특징을 활용,
"아빠는 신한민주당, 엄마는 민주한국당(제 3당)"라는 희대의 슬로건으로
전두환 측 민정계 의원들을 3위로 몰아내 대거 낙선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결과는 야당 122석, 여당 148석
신군부 측이 정권을 지키기엔 너무도 부족한 의석수였으며

이 결과에 분노한 전두환은 비둘기파인 노신영 안기부장을 해임,
전두환 정권을 파멸로 몰고갈 강경파 장세동 안기부장을 데려오니
결과적으로 야당 쪽의 대승리였다고 할 수 있겠다.

전두환 체제가 무너지는데는 장세동의 몫이 크다
이렇게 등장한 장세동은 관료출신인 노신영과 달리
전두환에 대한 충성을 빌미로 갖은 패악질을 부렸는데
이러한 강경노선이 결과적으로 전두환 체제의 파멸을 불러온다.
장세동의 트롤링 업적을 간단히 나열해보면,
먼저 그는 신한민주당을 분열시키려고했다.
당시 YS와 DJ는 정치규제 때문에 신민당 내 이민우와 이철승을 통한 대리 형태였는데

한번 사쿠라는 영원한 사쿠라
개버릇 남 못준다고 이철승은 이민우와 함께 신군부와 야합하여 의원내각제를 준비 중이었고
이는 86년에 이민우 구상을 통해 드러난다.
여기까지 장세동의 작전은 똑똑해보이나
상대가 사쿠라 다루기 짬밥만

장부장님, 58년 개띠 장세동 부장님 이 븅신아ㅋㅋ
15년차인 YS와 DJ라는걸 간과하였으며
YS와 DJ가 이끌던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는 즉각적으로 탈당 및 '통일민주당' 창당 시도

이때 동원된 깡패가 용팔이다
장세동은 허겁지겁 깡패를 동원하여 방해하였으나 실패
결국 여당에 비협조적이고 투쟁적인 야당을 낳고만다.

박정희 구군부가 말대꾸...?
거기다 장세동의 트롤링은 구군부와 JP 또한 크게 자극하고 마는데,
여태껏 통치적 정당성 확보를 위해 박정희와 구군부를 부패로 끝없이 내려쳤던 전두환과 신군부지만
JP는 크게 건드리지 않았는데
장세동은 그 특유의 오만함으로
86년 박정희 추도식을 하려던 JP를 협박 및 안기부를 동원하여 추도식 방해
이에 JP 또한 박정희 정신을 잇겠다며 정계복귀를 선언한다.

물론 진짜 염치 때문이라기 보다 JP는 자신이 YS, DJ에 비해
야당선명 민주인사로서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JP는 YS와 DJ를 러브콜에는 '그래도 군부출신인데 염치상 민주인사인척은...' 이라는 입장으로,
인기있는 인물이 없어 걱정이던 신군부의 러브콜에는 적당한 핑계로 거절해 왔는데
우리의 장세동은
JP를 신군부에 참여시키긴커녕 적대세력으로 참여시켰으니
그야말로 벌집 쑤시기의 장인이라 할 수 있겠다.

학생이 말대꾸...? 국보법 맛 좀 볼래...?
장세동의 트롤링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 이 후에 수지킴 사건이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에서
전두환 정권이 국민 비호감이 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다수의 시위가 발발

멘탈 탈탈 털린 표정
전두환 정권은 국보법을 너무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결국 평화노선의 노신영이 그를 지켜주고 있었던 셈
결국 가는 곳마다 적밖에 안만드는 장세동과 강경파 노선에
업보에 물린 전두환은 87년 4월 13일 긴급히 호헌조치(헌법유지)를 선언하지만
이는 역으로 정부가 국민과 협상할 생각이 없다는 인식을 주면서
전두환 정권에 종막과 호헌철폐(대통령 직선제)를 외치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6월항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6월 24일

마!!

깜짝

빨리 말해라 내 왜 불렀노?

그동안 장세동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나도 힘든게 많아... 올림픽 때문에 저 새끼들 강경진압도 못하고...

마!!

깜짝이야 진짜 씨발

길게 말안한다. 대통령직선제, 언론자유 보장, 정치규제 해제, 그리고 DJ도 정치하게 해주고 몇가지 더해서 8개항만 지켜도

내 후임인 노태우랑 얘기하면 안될까? 그건 나도 곤란하단 말야...

마!!

씨발 진짜..

니가 대통령인데 누구한테 맡기노? 이 시끼야 결자해지를 해라 결자해지

일단 알았어... 닭백숙이라도 먹고 얘기하...

됐고! 협상은 결렬이다. 니가 책임지라

하... 이 새끼는 진짜...
그렇게 야당과 마지막 협상에 실패한 전두환 체제는

6공화국의 서막을 알리는 6. 29 선언
6월 29일 선언을 하게된다.
이렇게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87년 체제가 성립되며
공화국 헌정사상 가장 긴 역사를 가진
제 6공화국이 출범한다.
물론 이런 찬란한 시작과 동시에
대한민국 정치와 사회에 있어 가장 암울한 부분인
지역감정이 이 때 폭발하게 되는데
그 중심에는 제 6공화국의 첫번째 대선이자
대한민국의 제 13대 대선에 있다.

이 둘의 마지막 평화
사실 86~87년도까지만 하더라도 YS와 DJ의 관계는 극락을 달리는데,
YS가 DJ의 사면복권을 돕는가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대통령 후보가 되어야한다고 양보하는 등 아주 깨가 쏟아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막상 87체제 대선논의가 시작될 무렵,
"나는 대통령이 되는 데 관심 없다. 현재로서 불출마 선언은 변함이 없다"
라고 발언한 DJ가 하루만에
"작년의 불출마 선언은 전두환대통령이 호헌철폐(직선제) 개헌을 하면 불출마 한다고 한 것이지, 이번처럼 국민에 의해(6월항쟁) 이루어진 것은 다르다"
며 출마의사를 밝힌다.

이게 YS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던게 전두환 정권내내 사실상 망명 중이있던 JP나 DJ와 달리
끝까지 국내에 남아 싸웠던건 YS와 상도동계였으며,
단식하다 죽을뻔한 것 역시 YS였다.
이러한 점을 면면히 알고있던 민주인사들은 YS를 후보로 내세울 것을 주장했는데
호남이 밀어주는 영남후보여야만 영남출신인 노태우 후보의 영남표를 뺏어올 수 있다는 '영남후보론'과
더불어

당시 YS를 지지했던 김수환 추기경
DJ가 가진 사상적 급진성 때문에 보수적인 성향의 유권자들이나 군부가 DJ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또한 내세웠다.
그러던 중 여기서 하나의 세력이 등장한다.
필자가 꼽는 신군부 출신 정치인들과 더불어 가장 대한민국을 병들게한 집단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
그 근간이 되는 n86 운동권의 등장이다.

이는 박정희가 미국과 대립했던 영향도 있다.
박정희 시대의 운동권은 자유민주주의적이고 친미, 반공적인 모습도 많이 보여주었는데
전두환 체제가 냉전체제를 이용함으로써
80년대 운동권은 반미적이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교조주의적 성격을 띠기 시작한다.

당시 민통련 의장 문익환
후에 무단 방북사태로 물의를 빚기도하였다.
이전 80년도 서울의 봄 당시에도 DJ가 비제도권에 있는 재야세력의 호응을 많이 이끌어냈었다.
그리고 87년 10월 12일 이들의 집단인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
DJ가 대선후보로 나와야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앞선 이유 때문에 YS를 단일화 후보로 주장한 후단파(후보단일화파)도 소수 있었으나,
대다수는 국가보안법 완전폐지, 노동 3권 보장등을 가져온 DJ를 후보로 내세워야한다는
비지파(비판적지지파)였다. (물론 DJ는 친미성향이었기 때문에 비판한 부분도 있었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의 사상적 실현, 소위 그들이 '민중역량 강화'라고 부르는 것들을 실현하기 위해선
DJ가 되어야한다는 입장이었고
그들은 '김대중 단일화후보론'을 밀게된다.
몇몇 광신적인 DJ 지지자과 n86 운동권들은 당시 DJ가 10월 25일에 있던 고려대 토론회에서
만 군중들이 갑자기 YS를 야유하고 DJ를 환호하여 YS는 치욕감에 도망가고
DJ는 그대로 뜨거운 열기에 등 떠밀려 출마했다고 무슨 DJ를 유비마냥 묘사하지만

물론 같은 학생 운동권이라도 NL 주사파계열과는 달리
종북이 아니라 자주적인 친북성향이라고 하지만
한국이 미국의 신식민지라는 종속이론을 주장하는 등
그냥 다 친북반미주의자들이다.
아까 언급한 DJ 비지파 세력들 중 하나인 학생운동권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주최한 것이
10. 25 고려대 '거국중립내각쟁취 실천대회(토론회)'로,

거국중립내각쟁취 실천대회 당시 서로 눈도 안마주치는 YS와 DJ
이들의 사이는 이 때 쫑난다.
YS는 이미 DJ쪽 지지자가 많아 본인에게 불리한 장소란 걸 알고 감수하고 간 상황이었으며

환호를 받는 YS와 각자 출마(비단일화)를 언급하자 야유를 받는 DJ
고려대 거국중립내각쟁취 실천회에서 YS가 야유 속에 떠나고 DJ가 열렬한 환호에 감동받았다는 얘기는 포도에 가깝다.
실제로는 YS든 DJ든 단일화하라는 일반군중들이 많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YS에 비해 DJ 연설에 더 큰 환호가 있었다는건 사실이나
그건 DJ 지지세력이 많은 곳에서 했으니 그런거고
YS는 뜻 밖의 야유 속에 떠나고 DJ는 국민의 부름에 받아서 결심했다느니
이런 얘기는 허구에 가깝다.
애초에 10월 12일부터 민통련이 DJ를 밀어준 것처럼
DJ측은 오래 전부터 신당 창당 및 독자 출마를 고려했으며
고려대 집회를 명분으로 삼아 그것을 공식화한 것 뿐이다.
실제로 DJ측은 바로 다음날, '고대집회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확인했으니 분당을 고려한다'고
이미 준비된 모습의 기자회견을 한다.
이 뿐만 아니라 혹자는 DJ가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 지역감정을 없애자' 라는 취지의 연설을 했기 때문에
13대 대선에서 지역감정을 조장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는 대구에서 한 연설로, 그럼 호남 후보가 당연히 상대방 지역에 가서 지역감정을 없이 투표해달라 하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런 논리면 호남이 밀어주는 영남후보는 반드시 이긴다는 '영남후보론'을 가져온 YS가 오히려 지역감정을 없애려고 한 사람이며,

차라리 기반없이 창당준비랑 대선을 동시에 준비하느라 제일 약했던 JP가 지역감정의 책임에서 그나마 자유롭다.
어쨌거나 결국 3김 1노는 그 누구도 지역감정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결론적으로 지역감정을 폭발시킨 13대 대선에 책임질 사람은 아무도 없게된다.
그리고

정신 좀 차려라, 병신같은 n86 운동권 세계관
애초에 DJ측이 들고나온 '4자필승론' 자체가 지역감정에 기반한 전략이다.
그렇다. 운동권과 DJ측은 전두환 체제 당시 DJ의 망명 공백으로 'DJ로의 단일화' 명분이 부족하자
선거기간 내내 '4자 필승론'을 강조하며 단일화없이 독자적인 출마를 강조하는데
충청의 표를 JP가 가져가고, PK의 표를 YS가, TK의 표를 노태우가 가져가면
호남과 도시 노동자들이 집약된 서울의 표를 DJ가 가져감으로서 DJ가 이길 수 있다는 전략으로
자신들의 사상적 실현을 위해 'DJ가 아니면 안된다'는 비지파들이 후단파들을 찍어누를 때 쓰던 논리이기도 하였다.

DJ는 대통령 시절 신자유주의 정책이나 여러모로 고평가 받을 부분이 많은데
'국민의 호응에 응하였느니', 'DJ는 지역감정을 막으려고했느니'
굳이 이런식으로 미화하고 신격화하는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다.
DJ는 자신의 야망 때문에 단일화 없이 후보로 나왔으며 이는 정치인으로서 부끄러운 행동이 아니다.

당시 그들이 끌고 다니던 전설적인 구름인파. 그들의 연설에는 온 도시가 마비되었다.
50만은 기본이고 주장에 따르면 400만이 모였다고도 한다.
물론 지역감정같은 경우,
YS, DJ, 노태우 모두 각자의 지역에서 구름같은 인파를 결집시키며
집토끼들을 대거 양성. 무슨 다이묘마냥 행세한 부분은 마땅히 책임이 있다.

이러한 집토끼들의 충성심은 타지역 후보에 대한 적개심으로 돌변했으며,
DJ는 대구에서 돌팔매를 당하고 노태우나 YS 또한 타지역에서 폭력 사태를 겪는 등
타지역 후보에 대한 적개심에 더불어 타지역에 대한 증오 또한 극에 달하게된다.
그리고 이렇게 다이묘 마냥 지역을 휘두르며 깊어졌던 YS와 DJ, 그리고 지지자들의 갈등은
결과적으로

어부지리
노태우의 당선으로 이어진다.
물론 YS와 DJ 측의 똥볼도 있었지만

신군부 원툴 책사였던 박철언이 월계수회를 조직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 라는 희대의 캐치프레이즈를 만들어
당시 시대흐름이었던 탈권위주의 이미지인 '보통사람'을 노태우에 이식시키면서
농담삼아 대선 후보 12번보다 인지도 없던 노태우를 국민들에게 각인시켰으며

북한에 의한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 일명 KAL기 폭파사건이 일어나면서
안보에 불안을 느낀 국민들이 대거 결집

충청 중 충북의 표와 PK 일부 지역의 표가 흡수되면서

엌ㅋㅋㅋ 시발 이게 뭐야
노태우가 당선된 점도 있다.

뭐, 이런 결과에서 볼 수 있듯이
13대 대선은 YS와 후단파가 옳고 DJ와 비지파가 틀렸는데
YS와 DJ의 표합산은 55%로
단일화 과정에서 표가 정확하게 오지 않는더라도 충분히 36%의 노태우를 이길 수 있는 표 차이 였으며
DJ의 생각과는 달리 막상 DJ 자체로도 YS를 이기지 못했으니
4자필승론은 결과적으로 틀린 셈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허무하고 실망감만 안겨주는 대선결과는 그간 쌓인 지역적 증오심과
뒤섞여 점차 3김에 대한 피로도로 이어지기 시작하니
어느덧 찬란했던 3김시대의 쇠퇴기가 시작되는 계기가 된다.
(쇠퇴기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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